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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미국 대통령의 의회 승인 없이 벌인 10대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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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TwinH 입니다. 오늘은 역대 미국 대통령들의 의회 승인없이 군사행동 10가지에 대해서 정리해봤습니다. 즐거운 시간되세요.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얼마전 의회 승인을 얻지 않고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에 대한 토마호크 미사일 공격을 명령했습니다. 이는 대통령직의 법적 권한에 관한 논란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미 헌법에 따르면 의회가 전쟁 권한법에 따라 적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해야만 대통령은 군사력을 공격적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전쟁 권한법은 대통령이 군대에 60일간의 공격적인 행동을 명령할 수 있는 보다 유연한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미국은 전쟁 권한법 시행 후 대통령은 의회에 군대 사용 허가를 요청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미국 역사속에는 여러가지 이유로 대통령이 의회의 승인 없이 전쟁에 나선 사례들로 가득합니다. 오늘은 그 중 10가지를 정리해봤습니다.

 

 

10. 아이티 민주화 운동 1994~1995

 

민주적으로 선출된 아이티 대통령 아리스티드는 1991년 군사 쿠테타 이후 추방되었습니다. 당시 월리엄 클린턴 대통령은 아리스티드에게 권력을 회복시켜주기 위해 아이티를 침공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작전명은 아이티의 민주 정부 복원으로 불리며 제82 공수부대 전체를 포함한 대규모 군대를 아이티로 투입시켰고, 쿠테타 정부는 즉각 항복했습니다. 결국 아리스티드는 미국의 보호하에 민주화의 정권 탈환을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아이티에 군대를 투입하기 전 미국 국민과 의원 다수는 개입에 반대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린턴 대통령은 유엔안전보장 이사회가 쿠테타 정부 제거를 승인한 결의안은 미 의회의 동의 없이 행동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며 아이티에 군대를 투입시켰습니다.

 

당시 작전은 성공이었지만 민주주의는 오랫동안 유지되지 못했습니다. 아리스티드는 권력을 유지하기위해 불법 선거를 저지른것으로 판명되었고 결함이 있는 지도자로 비난받았습니다. 결국 그는 2004년 다시 쿠테타로 물러났고, 이 사건으로 미국도 많은 비난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9. 시베리아 미국 원정군 1918~1920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연합국 개입의 일환으로 시베리아에 약 8,000명의 미군 병력을 배치했습니다. 연합국은 화이트 러시아의 반혁명 세력이 볼셰비키를 권력에서 제외하도록 도와줌으로써 러시아가 독일과의 전쟁에 다시 참가할 것을 희망했습니다.

 

 

비록 개입이 1차 세계대전의 일부로 여겨졌지만 1918년 11월 독일의 항복 후에도 미군은 시베리아에 머물렀습니다. 그 이유는 화이트 러시아를 돕기 위해 였으며, 영하 46도에 달하는 낮은 기온을 견뎌야만 했습니다. 윌슨은 여전히 볼셰비키 정부를 전복시키기를 원했지만 대중과 야당은 완강히 개입에 반대했습니다.

 

미군은 궁극적으로 1920년에 철수했으며, 볼셰비키는 결국 시베리아에 대한 통제권을 얻게되었습니다. 연합군의 개입은 1933년까지 미국과 소련정부간의 지속적인 적대감을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8. 이라크 사막여우 작전 1998

 

윌리엄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사담 후세인의 대량 살상무기 제조능력을 떨어뜨리기 위해 3일간의 이라크 폭격의 사막여우 작전을 시작했습니다. 이 미사일 공격으로 이라크의 군사력과 인프라가 크게 손상되었지만, 이 작전이 이라크의 대량 살상 무기 개발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당시 클린턴 대통령은 작전을 시작하기 전에 미 국회의 승인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1998년 있었던 이라크 해방 방안이 이 작전에 대한 충분한 법적 근거를 제공했다고 주장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사담 후세인이 이끄는 정권을 이라크 권력에서 제거하려는 노력을 지지하는 것이 미국의 정책이어야 한다."

 

 

공화당이 통제한 의회가 사담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보였을지라도 대통령의 비평가들은 작전이 실행된 시기가 이상하게 보였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사막여우 작전을 지시한 시기는 바로 르윈스키 스캔들로 클린턴에 대한 지속적인 탄핵 논쟁 시기와 일치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폭격에도 불구하고 후세인은 2003년 미군의 이라크 침공 "이라크 자유작전" 까지 계속 유지됐습니다. 한편 미국 하원은 사막여우 작전을 위한 폭탄 공격의 마지막날인 1998년 12월 19일 클린턴 대통령 탄핵안을 의결했습니다.

 

 

7. 대서양 해전 1941

 

진주만 공격 이전에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2차 세계대전 개입에 반대했습니다. 한편 1940년 부터 1941년 까지 영국은 나치독일과 맞서 생존을 위해 싸우고 있었습니다.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알고 영국을 비밀리에 돕고 싶어 했습니다.

 

 

1940년 5월 영국군은 아이슬란드를 침공했습니다. 왜냐하면 독일군이 항공기와 U-보트의 기지로 아이슬란드를 사용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루즈벨트는 미군을 파견해 섬을 점령하게 했습니다. 미군을 파견시킨 이유는 영국이 다른곳에서 싸우는 동안 아일랜드를 신경쓰지 않게 하기위해서 였습니다. 또한 루즈벨트는 뉴 펀들랜드와 카리브해에 있는 영국 해군 기지에서 장기 임대 계약으로 영국군에게 50대의 미국 구축함을 빌려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던 1941년 9월 독일 잠수함이 아이슬란드 근처의 한 미군 구축함을 어뢰로 공격하며 대서양 해전이 벌어지게됩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은 어뢰공격의 보복으로 미국 해군 함대와 전투기들에게 "우리들이 방어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는 해역에서 발견된 독일 잠수함을 모두 공격하라" 라고 지시했습니다. 이 명령은 1941년 12월 독일이 미국엔게 선전포고를 하기 3개월 전으로 승인없이 적대행위를 시작한것이었습니다.

 

 

6. 파나마 침공 1989~1990

 

파나마의 군사 지도자 노리에가와 미국의 긴장은 1988년부터 악화되었습니다. 당시 미국 중앙정보국(CIA)는 국제 마약사범인 노리에가와 정보 거래를 하였다는 비리가 폭로되며 비판을 받고 있었습니다.

 

 

1989년 12월 자신들과 거래하던 미국이 압박을 해오자 노리에가 군사들이 파나마 운하에 주둔하는 미 해군 검문소를 습격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에 조지 부시대통령은 의회 승인없이 즉각 파나마 보복침공을 명령했습니다. 노리에가 군대는 순식간에 무력화 되었고 노리에가는 파나마 시티의 바티칸 대사관으로 몸을 숨겼다가 2주만에 항복했습니다.

승인 받지 않았던 파나마 침공은 의회와 대중 모두에게 지지를 받았으며, 당시 최초 스텔스기였던 F-117 나이트호크가 첫 실전 배치되기도 했습니다.

 

 

5. 리비아 내전 2011

 

리비아 내전은 독재자 무아르마 카다피 정권에 반대하며 사임을 요구하는 인권 운동가를 처형하기 시작한 2011년 2월에 시작되었습니다. 내전 발생 후 반군들이 벵가지(Benghazi) 도시를 신속히 장악했지만, 카다피의 군대는 곧바로 도시를 탈환하였고 보복적인 유혈 사태를 촉발시킬 태세였습니다.

 

이에 나토군은 민간인을 보호하는 유엔안전보장 이사회 결의안을 인용해 카다피에 대한 공동 작전을 시작했습니다. 이 작전은 빠르게 반란군에 유리하게 내전의 흐름을 바꾸었습니다.

 

 

당시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리비아 공습을 시작하며 미국이 단독으로 전쟁에 참가하는게 아니라 나토를 지원하기 위해 전쟁에 개입한 것이기 때문에 전쟁 권한법이 적용받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국회의 승인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미 으회에서는 오바마의 이런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이미 투입된 미군 철수를 강요하지 않았습니다. (철수시킬 방법도 없었음)

 

카다피가 배수관에 숨어있다 잡혀 사살당한 후 2011년 10월 리비아 공습이 끝났습니다. 하지만 2012년에 있었던 리비아 주재 미국대사의 암살로 인해 비승인 리비아 공습에 대해 오늘까지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4. 코소보 전쟁 1999

 

코소보 전쟁은 세르비아가 지배하는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으로부터 독립을 모색한 코소보해방군 군사 조직에 의한 반란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에 유고 슬라비아는 세르비아군을 중심으로한 반란 세력을 근절하고 보복으로 민간인을 학살하기 시작해 나토가 유고슬라비아에 경고를 했지만 이를 무시했고 결국 나토군이 공습을 시작했습니다.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이 상원에서 통과된 코소보 공습에 대한 허가를 요청하지만 흥미롭게도 213-213의 결과로 하원을 통과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클린턴 대통령은 결과와 상관없이 코소보에서 유고슬라비아 군대에 대한 폭격을 지시하였습니다. 결국 나토군에 의해 유고슬리바아군은 철수해야만 했고결과적으로 코소보는 독립할 수 있었습니다.

 

 

3. 판초 비야에 대한 복수의 멕시코 원정 1916~1914

 

1916년 멕시코의 장군 판초 비야는 뉴 멕시코의 국경에 위치한 미국 콜럼버스 마을에 대한 공습을 했습니다. 미국이 멕시코 혁명에서 카란자를 도와준것에 대해 앙심을 품은 보복이었습니다.

비야의 군대는 콜럼버스 공습에서 큰 손실로 격퇴당했지만, 미국도 군인과 민간인 17명이 죽어 크게 분노했습니다. 이에 우드로 윌슨 대통령은 "나는 그 누구도 미국을 공격하면 반드시 몇 배의 보복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주겠다." 라고 말하며 즉시 존 퍼싱 장군에게 비야를 생포하거나 그러지 못할경우 죽이라고 명하며 멕시코로 보냈습니다.

 

 

이 멕시코 원정은 콜럼버스에 대한 비야의 습격으로 인한 방어적인 행동으로 법적 관점에서 정당화되었습니다. 따라서 승인을 통한 전쟁 선포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복수의 원정'이라는 용어가 암시하듯이 미국이 국경을 확보하는 것뿐만 아니라 보복을 목적으로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미군은 멕시코 국경 800km 이상 진군했으며 비야 부대에 심각한 손실을 입혔지만 카란자가 멕시코의 주권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더 이상의 멕시코로의 진군에 반대해 결국 미군은 비야가 도주하는 것을 막지못하고 철수해야만 했습니다.

 

 

2. 그레나다 긴급 분노 작전 1983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마르크스주의자가 통제하는 그레나다섬의 지속적인 불안정의 결과로 1983년 10월 긴급 분노 작전을 실행했습니다. 당시 그레나다의 총리는 쿠테타 사태로 처형당했으며, 새 정부는 즉결 집행으로 엄격한 24시간 통행 금지령을 시행했습니다. 이에 레이건 대통령은 이 섬에 있던 미국 의대생들이 해를 입을까 염려해 침략을 명령했습니다.

 

미군은 쿠바 군대의 지원을 받고있는 그레나다 군인 출신들의 강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섬에 존재하는 단 두개의 공항을 3일만에 신속히 장악하고 모든 미국 학생들을 안전하게 구출해냈습니다.

 

 

작전 후 레이건 대통령은 의회의 승인을 얻지 못한 이유에 대해 미국 학생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신속히 행동해야 했다고 주장하며, "침공의 속도는 의회에 공정한 공조가 부여되었음을 의미한다." 라고 말했습니다.

 

미국의 개입이 국제적으로는 그레나다의 주권을 침해 한 것으로 비난받았지만 미국 내에서는 학생들을 구출한것에 대해 많은 지지를 얻으며 인기를 끌었고, 이는 클린턴 이스트우드 영화에 영감을 주기도 했습니다.

 

 

1. 한국 전쟁 1950~

 

1950년 6월 북한의 김일성은 대규모의 한국 침공을 명령했습니다. 이것은 한국과 미국 모두를 놀라게한 침공이었습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처음에는 소련과 중공군이 개입할 것을 염려 하면서 미군의 한국 파견을 꺼렸습니다.

 

 

소련의 역사상 가장 큰 외교적 실수 가운데 하나인 소련이 유엔안전보장 이사회 회의에 불참한 것인데, 그 이유는 중국 공산당 정부가 중국 내전에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이 안전 보장 이사회 자리를 얻지 못했다고 항의하며 불참한 것입니다. 결국 소련은 회의 불참으로 인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었고, 유엔 안전보장 이사회는 회원국들에게 한국을 지원할 것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한국 전쟁에 미국의 개입을 정당화하기 위해 유엔 결의안을 사용하고 북한군을 격퇴시켰습니다. 한국 전쟁이 장기간에 걸친 교착 상태에서 3년이상 동안 계속 됐지만 트루먼은 의회에서 한국 전쟁이 유엔 결의안에 의해 합법적으로 다루어졌다고 주장하며 의회에 전쟁 권한법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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